남성과 완전히 다른 심리를 갖고 있는 여성은 남성이 전혀 알아채지 못한 것에 대하여 여러 가지 사실들을 알려주는 원천이다. 여자는 남성에게 영감을 준다. 남성을 훨씬 능가하는 여성의 예감 능력은 남성에게 도움이 되는 경고를 주며 개인적인 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여성의 감정은 남성이 지닌 개인적으로 별로 연관되지 않은 감정으로는 찾기 힘든 길들을 그에게 알려줄 수 있다. 자의식과 무의식의 관계에 대해서 남성과 여성은 본질 적으로 똑같은 심리적 전제를 갖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 양성에 차별점을 두는 것은 그 사회의 남녀관, 즉 전통적 편견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남녀의 평등을 울부짖는 여자들도 있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는 생물학저 구조도 다르고 생리적 기능도 다를뿐더러 심리적인 특징도 어떤 문화나 사회의 남녀관에 관련되지 않고 일반적으로 다르다.
남성, 여성의 본질
대체로 남성은 외부세상에 관심이 많아 사회적 지위나 권위 그리고 병예를 존중하고 정치나 국가 또는 학문과 관계를 맺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사고와 판단 이념이든지 사상이나 철학 같은 추상적인 것을 추구하기를 원한다. 남성적인 것의 모체가 되는 원형으로서의 '아버지'는 마치 바람처럼 세계를 움직이고 창조적 영감과 입김으로 여겨진다. 인간과 법과 국가 그리고 이성과 정신에 대한 연관을 확정하는 존재이며 자연의 동적인 힘, 폭풍과 바람의 뇌성, 그리고 번개와 같은 느낌다.
여성은 수용적이며 분석하고 판단하기보다는 느낌으로서 세계를 수용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 외 국가보다는 가정이, 추상적인 학설이나 이념, 보편적인 진리보다는 구체적인 개개인의 감정이 그들에게 더 중요하다. 여성의 의식은 매우 개인적이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 여성적인 것의 모체가 되는 '어머니'는 산출력 있는 땅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생명을 잉태하고 성장시키기도 하나 또한 인생의 마지막을 포용하기도 한다. 그만큼 무의식적인 것, 합리적이지 않으며, 영원한 것과 연계되어 있다.
남성과 여성은 어릴 때부터 다른 성향을 갖고 있고, 자라면서 그 개인이 속하고 있는 가정과 사회집단의 남녀관에 따라서 그 차이점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러한 차이점은 남녀의 의식적 태도의 차별점이고 무의식에는 또한 서로 다른 항목이 감춰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니마와 아니무스
아니마, 아니무스나 이런 무의식에 내재되어 있는 내적 인격의 특징을 말하며, 단순하게 말해서 남성의 무의식 속에 남아있는 여성적 요소를 '아니마', 여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남성적 요소를 '아니무스'라고 부른다. 이때 말하는 여성적, 남성적이란 단어는 각기 다른 내적인격의 특성을 지니게 되고 이것이 전인격에 보충됨으로써 하나의 개체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융이 남성에서의 무의식적 여성성, 여성에서의 무의식적 남성성을 굳이 심혼이나 심령으로 나타낸 이유는 이러한 요소가 실제로 원시신앙에서 볼 수 있는 정령관념처럼 고도의 자율성을 갖고 있는 요소로서 초속적 신성성을 갖고 있는 데 있다. 이러한 내적 인격은 외적 인격 때문에 생겨난 산물이 아니고 원래 그렇게 경험하게끔 준비된 원초적인 조건, 즉 원형가운데의 하나다. 물론 Seele라 할 때 이것은 결코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영혼이나 어떤 철학적인 개념은 아니다.
다만 기독교에서 유례를 볼 수 있다면 영지학파의 경험이고 철학과 연관 짓는다면 동양 고대철학의 음양설에 빗댈 수 있다고 융은 말한다. 하지만 융은 '아니마', '아니무스'는 어디까지나 체험적 관념이고 따라서 철학적, 이론적으로 이해하기보다 체험적으로 이해하기를 강조한다. 원형으로서 이나마, 아니무스는 그것이 투사되어 체험될 때 잘 인지 될 수 있다. 예시로 이성 간의 사랑에서 강렬한 황홀감을 일으킬 때, 그리고 상대방이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선녀, 현자 또는 영웅으로 인지될 때, 거기에는 언제나 이나마, 아니무스원형의 일방적 또는 상호투사가 일어나고 있다.
원형의 투사
이 원형이 반드시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인물에게만 투사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가나 시인은 자기의 아니마, 아니무스를 화폭이나 작품 속에 형상화한다. 반드시 사람으로서 형상화하지는 않는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나 비둘기 또는 태양과 달 속에 이나마, 아니무스 원형을 그려내어 그것이 그들 작품의 독특한 특색을 구성하도록 한다. 아니마, 아니무스는 또한 이념에 투사되기도 하고 물질에 투사되기도 한다. 그 이념에 계몽사상이든 공상주의든 기독교 사상이든 혹은 낭만주의든, 그것이 그의 아니마 또는 그녀의 아니무스 투사의 대상이 되면 그 이념들은 그들의 '사랑의 대상'이 된다.
열병에 걸린 환자처럼 그들은 그 사상과 주의에 매우 심하게 집착하게 된다. 백성이나 임금도 아니마 투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님'이라는 우리나라말은 상당히 강한 종교적 누미노제와 열정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정몽주의 "임향한 일편단심", 한용운의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할 때의 '님'이나 그 밖의 여러 시와 노래에 반영된 '님'은 모두 그 말에 내포되는 개인의 감정과 성질의 척도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단순한 연인의 의미를 넘어선 종교적 의미를 함축하며 '심상'과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원형이란 어느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누구의 마음에나 일반적으로 위치하므로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도 거기에 알맞은 범상치 않은 인물이 밖에 등장했을대는 모든 사람의 무의식을 자극하여 집단적으로 '심혼상'을 투사하는 결과를 초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