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 / 2025. 2. 15. 21:42

집단사회로부터 기인하는 페르소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그것은 일부분은 맞고 일부분은 틀리다. '나'는 집단속에 있으면서 집단과 어떤 형태로든지 관계를 맺고 살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인 동시에 정신적인 존재이다. 자기의 마음이라는 것이 있고 그 마음 안에는 아는 마음과 모르는 마음이 있다. 인간은 남들의 마음에 맞출 필요가 있는 동시에 자기의 마음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본인의 마음이 남의 마음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가 모르는 마음, 즉, 무의식이란 끝없이 깊고 넓은 것이라고 본다면 '나'는 한편으로는 사회라고 부르는 바깥세상을 바라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이라는 무궁무진한 세계를 깊게 관망해 볼 필요가 있다. 집단사회를 외적 세계와, 무의식세계를 포함한 마음의 세계를 내적세계라고 칭한다면 의식의 중심인 자아는 한편으로는 외적 세계에 적응하고 있으나 다른 한 편으로는 내적 세계에 적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집단사회로부터 기인하는 페르조나

 

인격의 페르소나

페르소나란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탈출처럼 어떤 사람이 노인의 탈을 쓰면 그는 노인 역할을 하며 왕의 탈을 쓰면 왕이 되는 것처럼 인간이 집단안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다양한 탈을 썼다가 벗었다가 하면서 살고 있다는 뜻에서 이 말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탈, 가면이라 하면 우선 도덕적인 위선을 연상할 사람이 많겠으나 결코 그런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탈이 탈을 쓴 사람의 개성이 아닌 것과 같이 '페르소나'라고 하면 실상이 아니라 가상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페르소나는 집단의 단위로 생각하는 작은 조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흔히 개성이라고 착각하기 쉬운 가면이다. 사람들이 곧잘 나의 생각과 나의 가치관 그리고 신념 및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그것은 결코 본인의 생각이 아니라 남들의 생각, 즉 부모의 생각, 선생의 생각 다른 친구들의 생각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집단적으로 주입된 생각이나 가치관인데 마치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깊게 따지고 보면 페르소나는 참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와 개인이 어떤 사람이 무엇으로 보이는 것에 대하여 사로 타협하여 얻은 결과이다. 그는 어떤 이름을 받아들이고 칭호를 얻고 지위라든가 또 이것저것을 남에게 내보인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이기는 하나 그 사람의 개성에 비추어 보아서는 2차적인 현실, 그 사람보다는 다름 사람이 더 많이 참여한 타협형성에 불과하다. 페르소나는 하나의 가상, 다르게 말하면 이차원적 현실이다.

 

개인정신은 집단정신로부터 나온 것이다

융은 이렇게 말한다. 가령 다양한 집단정신 중에서 그 사람이 어떤 것을 받아들였는가에 따라 개인적인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가 받아들인 것이 집단정신의 일부라는 점은 틀림없다. 페르소나는 내가 나로서 있는 것이 아니고 남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나를 더 크게 생각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것은 진정한 자기와는 다른 것이다. 페르소나에 입각한 태도는 주위의 일반적 기대에 맞추어 주는 태도이며, 외계와의 적응에서 편의상 생긴 기능콤플렉스이다. 따라서 그것은 환경에 대한 나의 작용과 환경이 나에게 작용하는 체험을 거치는 동안 만들어진다.

 

우리나라 말 가운데 페르소나에 해당하는 말은 체면, 얼굴, 낯과 같은 단어들이 있다. 어른의 체면, 남편의 체면, 선생의 체면, 숙녀의 체면 등 그것은 모두 어떤 사회집단이 그 집단의 특수한 성원에게 일관되게 요구하는 일정한 행동상의 규범이며 제복과 같은 것이다. 체면이라는 말을 '사명' , '본분', '도리'라는 말로 바꾸어도 똑같이 설명할 수 있다. 의사의 사명, 학생의 본분, 아들 된 도리, 주부의 역할이라고 할 때 이것은 그 개인이 살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라기보다 학생 집단, 의사라는 사람, 아들과 주부의 위치에 제한된 집단적 직업상과 그 지켜야 할 규범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정신은 내 가속한 집단으로부터 주입된 것이나 다름없다.

 

행동규범의 일반성을 표시할 때 '무엇'이란 말을 잘 쓴다. 남자란, 여자란 이래야 한다고 할 때 그것은 페르소나를 강조하는 말이 된다. 사람이란 이래야 한다고 시작하는 주장은 모두 그런 집단규범이다. 특히 대한민국은 이러한 페르소나가 강조되고 주입되어 있는 사회이며 개개인이 싫든 좋든 그것과 동일시하도록 요구받거나 어느 틈에 동일시되어 있어 진정으로 개성적인 것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여자는 집에서 음식하고 설거지하고 시집이 나가라"라는 말이나 누구의 아들,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 무슨 대학, 무슨 박사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한 개인의 개성과 능력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 그것을 통해 사람을 판단하고 가르는 것이 현재 한국 사회이다. 또한 집단적 규범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개성을 발휘하려고 하면 즉각 이를 위험시하고 아들 된 도리, 조직체의 단합 '형평성'을 내세우고 집단으로부터의 이탈을 '이기적, 비인간적'이라는 단어로 규탄함으로써 사회규범의 와해를 막고 개인을 일정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페르소나'가 민주주의 사회보다 권위주의 사회에서 더 중요시됨은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다.

 

집단사회에서의 동화

집단과의 관계를 지속해 나가는 동안 자아는 점점 자기도 모르게 집단정신에 동화되어 그것이 자기의 진정한 개성인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을 우리는 자아가 페르소나와 동일시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되면 집단이 요구하는 역할에 충실하게 맞추어주는 사람이 된다. 집단이 옳다고 말하는 규범이 어떤 것이든지 그것에 맞게 나를 끼워 맞추는 사람이 된다. 페르소나와의 동일시가 강해질수록 자아는 그의 내적인 정신세계와의 관계를 완전하게 잃어버리게 된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돌보지 못하게 되고 그 존재조차도 잊어버린다. 갱년기 우울증은 물론 임상적으로는 생물학적 요인도 그 성인의 하나로 작용하리라 생각되나 그 심리적 요인은 대개 그 사람이 페르소나와 심각하게 동일시해 왔기 때문에 무의식이 자아의식의 일방성을 대체하게 될 때 발현되는 증상이다. 

 

인간정신으로 하여금 하나의 전체가 되려고 하는 무의식의 작용이 의식의 경직된 일방적 태도를 과하게 보상하려 하면 자아의식의 기능을 정지시키기에 충분한 장애가 생기게 되는 것이며, 우울증상은 그것을 통해서 밖으로만 향해 온 자아의 시선을 안으로 돌리려고 하는 목적도 생기게 된다.

 

갱년기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 지나치게 꼼꼼하고 보수적이고 양심적이며 강박적이고 규칙을 잘 지키는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은 이런 설명을 더할 나위 없이 지지해 준다. 우울증 뿐만 아니라 중년 이후의 다른 종류의 심리적 요인들도 지나친 외향화, 즉 외적 세계를 중심으로 내적 인격의 대상이 과도하게 되었을 때 나타난다. 결혼 40년 동안 성실하게 집안일을 맡아온 주부가 남편의 외도를 발견하고 갑자기 히스테리성 발작을 일으키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성당에도 성실하게 다니며, 좋은 일을 도맡아서 해 왔습니다. 아이들 밥도 매일매일 챙겨주고, 남편의 뒷바라지도 성실하게 해 왔습니다.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왜 나쁜 짓을 한 내 남편은 뻔뻔하게 돌아다니고 왜 나는 이런 병에 걸려 병원신세를 져야 합니까?"

 

그녀의 말은 맞았다. 그녀는 모범주부이고 좋은 어머니였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녀는 집단사회가 안내하는 대로만 행했고, 그녀 자신의 마음을 소홀히 하였다. 어머니로서의 페르소나, 아내로서, 시민으로서의 페르소나에 완전히 자신의 자아를 일치시키며 살아왔다. 그리고 이제 가족관계의 장애는 그녀로 하여금 그녀 자신을 찾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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